월 20만 원 벌어온 남편에게 "못먹어도GO"라던 아내, 20년 후 아카데미에서 오열하다

흔히 예술가는 가난하다고 하지요. 그리고 가난한 예술가의 곁에는 생계를 책임지면서 그의 예술적 영감을 지지해주는 헌신적 아내가 있기 마련인데요. 가난한 예술가와 헌신적 아내의 사랑 그리고 역경을 극복한 성공담은 동화 속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아카데미의 레드카펫을 밟는 것은 물론 작품상, 감독상, 국제장편영화상, 각본상 등 무려 4관왕을 휩쓴 영광의 주인공 봉준호 감독 역시 20년 전 가난한 영화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영화감독 봉준호를 지지하는 첫 번째 독자이자 사랑하는 아내 정선영 시나리오 작가가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각본상 수상자로 호명되어 처음으로 아카데미의 무대에 오른 순간 아내를 떠올렸습니다. "언제나 많은 영감을 주는 아내에게 감사하다"라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지요.

봉 감독이 아내에게 영감을 받기 시작한 처음은 무려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학시절 영화 동아리를 통해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영화라는 공감대를 통해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했는데요. 봉 감독은 아내와의 연애를 회상하며 "영화동아리에서 영화광인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나의 첫 번째 독자였다. 대본을 완성하고 그녀에게 보여줄 때마다 너무 두려웠다"라고 전했지요.

봉 감독이 두려워 한 아내는 사실 봉 감독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었습니다. 정선영 작가는 결혼 전인 1994년 개봉한 단편영화 '지리멸렬'에 편집 스태프로 직접 참여하며 봉 감독의 영화 작업을 돕기도 했는데요. 1995년 결혼에 골인한 후에도 영화인 봉준호의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지했지요.

결혼 직후 봉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와 조감독으로 활동했습니다. 1997년 개봉작 '모텔선인장'의 조감독을 맡을 당시에는 1년 10개월 동안 일하면서 제작사에서 받은 돈이 총 450만 원이었지요. 워낙 생활고가 심했던 탓에 친구들에게 쌀을 얻어먹어야 할 정도였는데요.

벼랑 끝에 선 듯했던 봉 감독은 1998년 당시 1년 치 생활비가 남았으니 마지막으로 1년만 더 올인해 보고 싶다는 의지를 전했고 이에 아내는 "못먹어도 고!"라며 흔쾌히 남편을 응원했습니다. 그렇게 아내 덕분에 마련한 1년의 시간 동안 봉 감독은 데뷔작 '플란다스의개'를 완성하게 되는데요. 영화의 배경이 된 복도식 아파트는 실제 봉 감독과 아내의 신혼집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

장편 데뷔작인 '플란다스의개'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다음 작품을 준비할 여력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봉준호 만의 화법은 충무로에서 눈길을 끌었고 덕분에 다음 영화 '살인의 추억'이 탄생할 수 있었는데요. 살인의 추억이 소위 흥행 대박을 치면서 봉준호는 더 이상 가난한 예술가가 아니었지요.

다만 영화 '괴물' 작업 당시에는 CG에 워낙 큰돈이 들다 보니 투자자를 찾기 힘들어 고생하기도 했는데요. 영화 '반지의 제왕'을 작업한 회사와 예산 때문에 계약이 결렬되면서 자살까지 생각했던 당시에도 그를 잡아준 건 아내였습니다.

그리고 쌀을 얻어먹던 가난한 예술가의 아내는 20여 년 후 아카데미 시상식 현장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는 남편을 축하하며 오열했습니다. 아마 쉽지만은 않았던 지난 세월들이 스쳤겠지요. 1998년 당시 1년만 더 달라는 봉준호의 말에 "못 먹어도 고!"를 외치지 않았다면 아카데미 무대 위의 봉준호는 없었을 테니 오스카의 영광 중 5할은 정선영 작가의 것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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